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흐메드 알리 (문단 편집) == 평가 == 알리의 생애에 대해 이집트의 경제학자 아민은 강력한 독립국가와 근대화를 달성하고 외세의 압박에 굴하지 않았기에 훗날 [[가말 압델 나세르]]의 생애와 공통된 점이 있다고 호평했다. 군사적 연전연승은 맘루크조의 [[바이바르스]]에 필적된다고 평가 받기도 했다. 레바논의 역사가 필립.K.히티는 19세기 이집트의 역사는 메흐메드 알리의 이야기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교육제도를 본받아 의무교육을 실시했고 군제, 세제, 행정, 통상, 농업, 산업 전 분야에 걸쳐 많은 개혁을 실시해 이집트를 근대화시켰다. 메흐메드 알리 그 자신도 청결을 중시하고 검소하며, 인품이 좋아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집트 왕국을 뒤엎고 공화국으로 만든 나세르도 알리는 높게 평가했으며, 메흐메드 알리는 현재도 이집트의 역사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그러나 메흐메드 알리의 통치는 맘루크들이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 못지않게 가혹했다. 면화 농장에서는 농민들이 면화를 재배하다 죽어갔으며 세금을 안 내면 꼬챙이에 꿰이는 등 비참한 대우를 받아야 했고 공장과 교육은 전쟁터로 내 보낼 병사들을 만들기 위한 '병기창'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메흐메드 알리는 전쟁에서 승승장구했음에도 정작 시리아 등의 점령지에서 전혀 민심을 얻지 못해 더 나아가지 못하고 발목이 잡혔으며 [[남북전쟁]] 이후 미국 남부의 면화 공급이 풀리면서 이집트 면화의 수입이 급감하자 농민들은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이 시기 산업화는 서구 열강 본국 내에서조차 도시가 농촌을, 공장이 노동자를 말 그대로 착취하는 지옥과도 같은 수준이었고 무함마드 알리는 더 빠르게 산업화를 하겠답시고 여기에 더한 착취와 수탈을 했다. 그렇게 해서 키운 산업은 군사적 투자로 재편되었고 이집트의 실질 경제 상태는 매우 취약했다. 그 군사력도 열강에게 대항할 정도는 되지 못했다. 지중해 연안은 유럽 열강의 세력투사에 대항하기엔 너무 가까웠던 탓이 컸지만. 또한 지정학적 영향이 너무나도 컸다. 19세기 최강대국 영국의 입장에서 이집트는 영국과 인도를 잇는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였다.그리고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이집트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영국은 이집트 문제에 끝없이 개입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알리는 산업 발전에 필수적인 관세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다. 상술했듯이 오스만 제국을 러시아로부터 인도를 지키는 방파제로 인식한 영국의 이해에 따라 알리의 부상은 용납될 수 없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메흐메드 알리는 [[영러협상]] 시점까지 발칸과 중동, 중앙아시아,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영국과 러시아의 지정학적 경쟁인 [[그레이트 게임]]의 시작을 알렸다. 이러한 세계사적 무게는 발전 도상의 독립하지 못한 지방 정부 수장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하튼 메흐메드 알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유라시아의 지정학적 경쟁과 중동 특유의 가문-혈족 중심 지배체제의 기원, 그리고 중동 근대화 과정의 시조로 볼 수 있는 인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